I.D    암호   
회원가입암호분실

                               

토론

사람공부

한국학

교육

대학

인물

음식

 

자동차

부동산

경제

법률

군사

 

 

스포츠

영어

영화

방송

생활

음악

취미

보험

병원

클리닉

건강

Q&A

중고

직장

 

 

총류

철학

종교

사회

과학

기술

예술

언어

문학

역사

컴퓨터

창업

지역

범죄

 

 

알림

이미지

동영상

뉴스

자격

기업

아동

여행

서비스

결혼

북한

쇼핑

여성

 

 

 


 

 

 
114m.com 토론 게시판 제목 없음

토론

핫이슈

정치

경제

사회

역사

군사

교육

문화

국제

칼럼


 

2023. 12. 08.  
LIST  VOTE  MODIFY  DELETE  WRITE  REPLY 
   제목: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군인
글쓴이: 114m.com  조회: 2112   추천: 512
 

 

 

1980년은 우리 사회가 격동을 경험한 시대였을 뿐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고통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신학대학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지만, 성서의 요나처럼 내 짐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대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런 나를 하나님은 마치 요나를 바닷물에 던지듯이 특전사라는 곳에 가게 하시고,

끝내는 5월의 광주 그 참*옥한 현장에 던져지게 하셨다.

그 후 근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끔*찍한 현장의 기억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입은 육체의 부상과 마음의 상처로 말미암아 될 수 있으면 그로부터 멀리 떠나 살려 했던 것이다.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 신앙 생활과 농촌 교회의 목회 여건이

나 자신의 위치를 떠나 심각한 역사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반드시 언젠가는 5월이 되면 광주를 찾아 그 끔*찍했던 현장들을

돌아보며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고 싶었고, 또 망월동에 누워 있는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희망이 간절했다.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 · 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특전사주전*투요원인 하사관들과 사병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군부의 의도는 알 수조차 없었고,

단지 대통령이 죽*고 나라가 혼*란하니 전*쟁의 위*험이 있고, 그러니 빨리 이런 소*요를 진*압해야 한다는

단순한 안보 논리만을 믿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 용*공 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피치 못하게 전개된 사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1979년 10월 내가 자대에 배치를 받은 이후 특전사 예하의 모든 부대는 정규 훈련을 제치고

소위 진*압 훈련만 죽*어라 하였다 그때 나는 왜 북한군의 위*협이 있다면서 전*쟁 대비는 하지 않고

데*모 진*압 훈련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1980년 봄이 되어서는 학생들의 시*위와 세 김씨의

경쟁으로 인한 분열로 세상은 암담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공수 요원들은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병사들은 강원도 깊은 산 속을 뒤지며 박달나무 같은 튼튼한 나무들을 베*어다가 진*압봉을

자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고, 시*위 조기 진*압과 정국의 안정이 시급하며

좌*경 분*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정신 교육을 되풀이해서 받았다.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저녁에 부대를 출발하여 밤늦게 춘천역에 도착한 후 커튼이 다쳐진 열차에 몸을 싣고 새벽에

김포의 공수여단에 도착하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속으로 ‘6· 25 때 북한 군인들이

포장으로 가린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데, 이게 무슨 희한한 일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알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그 동안 몇 차례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되곤 하더니,

드디어 17일 저녁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군용차량에 탑승해 서울 시내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동국대학교였고, 시간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학교 내에 있는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러 다니고, 나머지는 짐 정리를

중단한 채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희성 씨가 나와 카랑카랑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며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갑자기 다시 짐을 싸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사병들은 영문을 모른 채 제주도에 대대적인

게*릴라들이 침*투해서 그리로 간다는 막연한 소문만 듣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차비를 차려야만 하였다.

일부는 먼저 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하였고. 나머지 부대들은 밤늦게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부대원들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 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명령대로 행하여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까닭에 어느 누구도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 답답해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시간은 심장 박동과 함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기차가 경부선을 달려가는 도중 부모님이 목회하시는 평택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어두운 들을 지나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는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 왔다.

나는 가방 속에서 내무반에서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읽곤 하던 한국 청년에게 고함이란 책이었다.

나는 그때 건성으로 그것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청년’중 하나인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런 판국에 무슨 책을 읽느냐는 동료들의 핀잔이 귓전을 때*렸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ㅍ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ㄷ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ㅇ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ㄱ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ㅈ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갸*샤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ㅈ고 짓ㅅ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ㅈ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 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ㅈ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ㅈ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ㅈ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ㅈ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ㅊ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20일 오전 오후 내내 우리는 시내를 돌며 시*위를 진*압하였는데,

군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직접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사람들이 더욱 늘어 거리에 가득하게 모이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사*태가 이 지경이니 궁금하기도 하고, 달리는 감히 겁이 나서 시*위 대열에 끼지는 못하지만

시*위에 대하여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공수 요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 *들은 다 죽*여야 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이미 맹목적인 분*노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은 전날 같지 않게 그렇게 심한 폭ㄹ력이 행사되지는 않았다.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지휘관들의 자제 명령도 있었고,

또 군인들의 위*압적인 진*압으로 일시나마 학생들의 시*위 대열도 흐트러져 본격적인 시*위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ㄷ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ㅈ자비하게 죽ㄱ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ㄹ륙육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ㅅ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ㅁ명들로 범벅된 아비ㄱ규환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ㅇ아 거의 초죽ㅇ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한 골목을 들어서니 자그만 교회가 보이고 그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급히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kingpower :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ㄹ륙육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2021.03.19.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2021.02.24.
독자 :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2021.02.24.

LIST  VOTE  MODIFY  DELETE  WRITE  REPLY 





전체글 목록 2023. 12. 08.  전체글: 23  방문수: 126594
   몸을 일으켜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1] 114m.com2476622
  그는 처음에는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서재로 나와 함께 [1] 114m.com2111518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군.. [3] 114m.com2112512
  선관위 자살골, 노트북이 말한다 토론2255558
  [주요장면] 무너진 정의와 공정의 회복 - 진중권교수 강의 (풀버.. [1] 진중권2429588
  이국종 전화 인터뷰 “장관 딸이 외상센터 근무하면 이따위로 하.. [3] 이국종1628519
  진중권 "손석희 사장이 JTBC로 부른 줄 알았다" [1] 토론1435442
  "전두환, 12·12군사반란 40년 지난 오늘 가담자들과 기념오찬"(.. [8] 전두환2033529
  re: 전두환, 12·12군사반란 40년 지난 오늘 가담자들과 .. [3] 두환이 형1829529
  re: re: 대머리는 공짜를 좋아하나??? 노가리1769527
  re: re: re: 대머리는 공짜를 좋아하나??? 대머리1791523
  김건모 성폭행·폭행 논란에도 장인 장욱조, '불후의 명곡' 예정.. [1] 건모1786498
  비자금을 종잣돈으로 불린 재산 1조 추정.. 1672억 추징금 내도 .. com114m3209924
  안철수 교수, 무늬만 전세살이?…논란 확산 [3] com114m3180757
   여호와를 敬畏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com114m3200856
  우리가 당면한 ‘정의의 문제’ com114m3200889
  "'불편한 진실'…천안함, '잔치'는 끝났다" 프레시안3844880
  [홍성태의 '세상 읽기'] 학생 인권 조례를 위하여 com114m3626893
  노무현 정부 처음엔 수도분할 비효율 주장 com114m3488951
  우리는 金大中을「수령님의 戰士」라고 불렀다 com114m3556938
RELOAD WRITE
1 [2]






 

 

 

 


Copyright ⓒ 114m.com All rights reserved.  Since 2002

제휴 광고 문의: mail@114m.com